이단 영지주의는 아버지인 신과 구원자인 신을 대립시켰다. 이러한 견해는 반영지주의적 교부들에 의해서 <창조자의 모독>이라 일컬었다. 이는 오늘날 신정통주의 신학자들에 의해 자유주의신학이 부정받음에 같다.
다시 말해서 이들 영지주의는 창조주인 신에 대해서 이원론적 모독을 저질렀는데, 이들은 창조주요 구원자를 아주 철저하게 대립시켰기 때문에, 신의 창조세계를 죄의 세계와 동일시하게 되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들은 신의 창조를 은근히 모독했다.
이러한 경향에 대하여 이레니우스는 신은 하나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신에게 이원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율법과 복음. 창조와 구원이라는 이 둘은 같은 신에게서 나온다. 신에 관한 지식이란 실존적인 것이지 사변적인 것이 아니다. 이레니우스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신없이 신을 인식할 수가 없다. 신은 결코 우리의 인식 대상이 될 수 없다. 신은 모든 인식에 있어서 인식의 주체이며, 우리 안에서 그리고 우리를 통해서 자기 자신을 인식하는 분이다. 신만이 자기 자신을 인식할 수 있다. 우리는 다만 그 인식에 참여할 뿐이다.
신은 그의 위대성, 그의 절대성, 그의 무제약적(무조건적) 성격에 있어서는 인식되지 않는다. 다만 그의 사랑에 있어서만 인식될 뿐이다. 따라서 신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인간은 신 안에 있지 않으면 안 되며, 신에게 참여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간은 결코 신을 하나의 대상처럼 밖에서 관찰할 수는 없다. 이러한 신이 세계를 무로부터 창조했다.
이 <무로부터>라는 표현은 신이 어떤 방식으로 세계를 창조했는가를 기술하려는데 그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하나의 부정적 주장, 곧 창조 이전에 물질이 선재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려는데 의미가 있다. 이레니우스는 이 부정을 통하여 이교적인 이원론을 막았다.
다시 말해서 신은 그리이스의 데미우르고스(Demiurgos) 신과는 달리, 그에게 대항하는 물질에는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신은 자신과 나란히 설 수 있는 어떠한 창조자나 데미우르고스도 갖지 않는다. 신 자신이 세계의 창조자이다. 창조자인 신의 목표, 그의 내적인 목적은 인류의 구원에 있다. 그러기에 창조자인 신과 구원자인 신은 하나이다.
그리고 신의 창조는 선하다. 창조자인 신의 모독은 <옛 것이든 새 것이든> 언제나 세계의 선한 창조를 왜곡한 것으로 잘못 알은데서부터 유래한다.
이 하나(唯一)인 신은 삼위(trias)의 신, 곧 삼위일체 신이다. 신은 하나인 신이지만 결코 외로운 신은 아니다. 이레니우스가 말한 것처럼 신에게는 언제나 말과 지혜, 곧 아들과 성령이 존재한다. 신은 이것들을 통해서 스스로의 자유로운 의지에 의해서 (자유롭고, 자발적으로) 창조했다. 여기에서 삼일성(三一性)은 초월적인 것으로 파악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신에게 내재한 삼일성이다. 신은 살아있는 신이며 죽은 동일성이 아니다. 그 때문에 그는 결코 외롭지가 않은 것이다. 신은 언제나 그 자신 안에 그의 말과 지혜를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신이 영으로 살아 있다는 <신의 영적인 삶> 상징이며 신의 자기 현시와 자기 실현의 표징이다. 삼위일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이 시대의 신학자에게까지 되돌아가지 않으면 안된다.
그럴적에 우리는 삼위일체론이란 생명의 창조적 바탕에 관한 서술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이레니우스는 구원을 아나케팔라이오시스 Anakepkalaiosis 또는 레카피툴라티오 recapitylatio 라고 불렀다. 이것은 에베소서 1:10 ``< 때가 차면 >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한 것을 가리킨다. 이레니우스가 그의 구원론을 바탕으로 삼은 이 말은
아담에 의해서 깨어져버린 similitudo 곧 불사성에의 가능성이 그리스도에 의해서 다시 회복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인류가 본래 그렇게 되도록 예상되어 있었던 것이, (한때 아담에 의해서 무너졌지만) 마침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리스도로 더불어 새로운 인류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인류뿐 아니라 전 우주도 그리스도의 출현에서 그 성취를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성취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아담의 본성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아담이 죽은 자의 시작이었듯이 그리스도는 산 자의 시작이다. 아담은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된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는 아담이 마땅히 되어야할 본질적 인간이다.
아담은 어린이처럼 순진무구하게 살고 있었을 따름이다. 이 깊은 사상을 나는 초월적 휴머니즘(Transzenden`er Humanismus, transcenden humaism)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이 초월적 휴머니즘은 그리스도가 본질적 인간의 완성 , 곧 아담의 본성의 완성을 의미하는 휴머니즘이다. 아담(곧 인류 그 자체)은 그가 되어야 할 것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래서 아담의 어린이와 같은 순진무구성은 상실되었다.) 그러나 둘째 아담(그리스도)은 그가 되어야 할 것, 곧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나타난 완전한 인간성에 대한 참여를 통해서 우리 역시 완전한 인간성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여기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불사성(무한성)에의 참여인 신과의 유사성(similitudo)이 있다.
터툴리아누스는 ...신은 자신 안에 이성 또는 로고스를 영원히 가지고 있다. 이것은 신의 내적 언어이다. 그 때문에 신의 본질은 영이라고 일컬어진다. 우리가 신을 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신을 또한 삼위일체적이라고 곧 신은 자신 안에 말, 로고스를 가지는 동시에 그의 자기대상화와의 통일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
<부라텐판<독일어> 인용 틸리히 글에서 발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