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경

사9:6 -- 영존하시는 아버지

- bada - 2008. 2. 12. 11:15

 

 

그대 마음 속에 이 불이 타게 하리라 그대 가슴 속에 이 불이 타게 하라.

영원하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불로서

..................

 

 

 

// haabbu 정의 ::


이는 영존하시는 아버지에 대해서....

스스로 있는 자이신 유일자 하나님으로서 창세 전에 함께 가졌던 삼위로서의 영화로움이 답이다....


한 아이가 아버지라 불리움이 가능한 것은,

일체되심에서이며, 이 일체되심으로서 아버지를 유일하게 드러내는 아들로서였던 것이다.


이는 계 21:22~23 자로서, 4:장의 보좌에 앉으신 이와 7등불로서 ~ 5:장의 어린양과 G7영으로서이신데 이 5:장의 어린양께서 보좌와 등불을 그리고 (장로) 관통하고 있으심에이다.


그렇기에 구약 성막 지성소의 빈형상에 아버지 보좌로 앉는 자로서이셨기에(계3:21) , 그 보좌에 하나되시는 진실로 합당한 자시다.


이로써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자며, 아버지라 불리우기에(기묘자 모사 전능한하나님 영존아버지) 부족함이 없으시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자( 〃도 불리우는 자) (중용적 포괄) ○

아버지의 이름을 갖고 오신자. (50%만 맞음  듯) △

아버지이신 자. ×


이는 구교적 천상의 분리된 아버지로서의 정적인 하나님이 아니라 ,

아들 안에서 세상에 오시사 그 안에 이미 구현된 동적인 아버지로서 하나이시기에 이다.


(아버지는 이미 세상에 왔다. 아들은 아버지로 왔음의 증거를 보였으나 믿지 않았으며 이 아버지를 버렸다. 예수가 그리이스도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긴 자가 과연 누구뇨? 요일5:1, 아들이 있는 자에게 아버지가 있다 요일2:23)


그러므로

나는 아버지께로서 나왔고  내 안에 아버지가 있으며 아버지 안에 내가 있음이다 (격위=삼위성),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며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본체의 일체성=유일성)라고 하심이 이해된다.


그분께서 처음부터 명시한 새계명(요일2:7, 요14:21, 13:34)을 지키는 자에게

아들과 아버지가 이중적으로 임하신다고 말씀하시며 (요14:23~26, 26성령 포괄) 이는 즉

성령 안에서 말씀의 감동을 따라 행하는 자에게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임재하신다는 삼위일체적인 말씀인 것이다.


그 이름이 기묘 모사 전능하나님 영존아버지라 불리우는 십자가(정사)를 진 성육신하신 한 아이....

그가 바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아들인 본체의 형상(하나님 속 하나님)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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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버지의 증거를 저들에게 보였으나 저들은 믿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미 왔다. 아버지는 아들 안에서 왔다.

그러나 세상은 나를 거절하여 아버지를 버렸다.


아들은 아버지가 아니지만

아버지 개념을 포괄하고 나온다.


이는 마치 주는 성부에게만 돌려지나 아들에게도 돌려지며(복음서) 또한 주로 높이심(빌2:11)과 같다.

이는 바로 일체되심의 특혜로서 아버지란 호칭을 부여했다


아버지의 이름을 갖고 오셨으며” (“아버지와 하나이셨으며“ 유일자) “아버지와 하나되셨다(보좌로)”.  만물의 시작이란 뜻으로도 유통되겠으나 이는 가장 협소적으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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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존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문제


1) 예수님만이 하나님 아버지를 구체적 보여주셨음 *(요 1:18)

2)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는 일체이십니다. *(히 1:3)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두가지이다.

  하나는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버지로 사역하신다. 하나는 예수님의 사역은 영원하다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예수님을 떠나서 생명을 유지 할 수 없으며 구원 받을 수는 없다

 

아들인 성자는 성부의 본성을 완벽하게 전해줄 수 있는 분임이 틀림없다. 인간-하나님이신 그가 마침내 이 땅에 오셨을 때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하지만 무한히 지혜로운 뜻을 담아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말씀하셨다. 심지어 하나님의 적들까지도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요한복음 7:46)하고 탄복하였던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그 예언의 뜻은 실질적으로 그 두 단어 - '기묘자 (Wonderful)'와 '모사 (Councillor)' - 를 합쳐놓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해석도 또한 맞는다. 그는 인생살이에서 필요한 모든 주제들에 대한 '기적적인 조언자' 로서의 소임을 다하고 있었기에, 어떤 문제에 대한 자문을 구해도 그는 결코 외면하든가 얼버무리지 않았다. 그분이야말로 하늘이 보내주신 가장 기묘한 참 상담자였기에, 모든 주제에 대해 완벽하게 말씀해 주셨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이 '전능하신 하나님' 임을 또한 주목하여야 한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로 인해서 그가 神格 중에서 (삼위일체 가운데서) 두 번째 위치(e종속적)에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육화 이전의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였다' (빌립보서 2:6). 심지어 그는 스스로 해(害) 받음을 허락하신 다음에도 그는 죽음 그 자체를 정복하였기에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태복음 28:18) 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또한 '영원하신 아버지'

- 또는 수많은 권위자들이 번역한 바를 따르면 '영원의 하나님' 이기도 하다. 그는 공간과 물질은 물론 시간의 창조자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골로새서 1:16), 그리고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3). 그리고 비록 그가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었지만, 그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10:30) 라고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또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만 할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평화의 왕자 (The Prince of Peace)'의 자격이다. 비록 그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는 또한 인간이다. 그러므로 그만이 유일하게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성공적인 참 중보가 될 수 있다 (디모데전서 2:5).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고린도후서 5:19) 세계에 참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는 '…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골로새서 1:20). 그러므로 '그는 위대한 화평케 하는 자' 이시다 (마태복음 5:9).


이 다중차원의 이름들이 어찌도 영광스러운지요!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인간이신 바로 이 분에 관해서 언급하면서, 예레미아 선지자는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예레미아 23:6) 라고 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린도전서 1:30). 하나님



'예수 (Jesus)' 라는 이름은 이사야와 예레미아가 예언하였던 고매한 이름보다는 훨씬 단순한 이름 같이 보인다. 유대인들 중에서 이미 그 이름 - 여호수아, 이사야, 호세아, 예수아 (Joshua, Isaiah, Hosea, Jeshua) - 로 알려진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이름들은 모두 다 바로 그 이름의 변형이. 그러나 그 이름은 이 모든 이름들을 포용한다는 것을 안다면 놀랍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이 이름이 단순히 '여호와께서 구원하시리라' 또는 '우리의 구주 여호와' 라는 뜻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은 하늘에 계시는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부여한 인간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 이름은 타락한 세상과 죄에 빠져 용서와 화평과 영생을 소망하는 남자와 여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그의 총체적 전도사역을 내포한다.


아직도 남은 이름들이 더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그의 이름이 신약의 최초의 장에 언급되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태복음 1:16). 이를 보면 그는 예수라고 불렸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라고도 불렸다.


이 아이는 여러 이름 속에서 신적인 분이요, 하나님 그 자신임을 가리키고 있다. 그는 생명의 근원이심을 말함으로써 구속자이심까지도 증언한다. 또한 이 구절들은 메시야의 영원성까지도 증언하고 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본문에서 두 구절의 동사가 이 모두 완료형으로 쓰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이 아이의 탄생은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이미 발생한 것으로 간주한. 즉 동사의 완료형태는 선지자가 아하스 왕 시대의 어려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상징적으로 보여 줄 아기가 이미 출생했음을 선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와 더불어 뒤에 나오는 동사 ar;q]YIw"""(and he called)와 관련하여 이 구절은 새로운 통치자의 즉위식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주장도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그러나 이 두 동사는 예언적 완료형이다. 완료형으로 쓰인 것은 예언의 확실성을 나타낸다. 칼빈은 이렇게 미래의 사건을 과거시제로 표현하는 이유는 바로 백성들의 면전에서 그 사건을 생생하게 펼쳐 보이는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이것은 미래형을 써서 막연한 미래에 대한 가상적인 예언을 주기보다는, 완료형을 사용하여 어떤 정해진 때에 이미 이것이 이루어진 것을 말하는 역사적인 확실성을 보장하기 위한 의도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삼위일체의 아버지 하나님과 구별되므로 이 말 때문에 당혹해 한다. 그러나 여기서 아버지는 삼위일체의 한 위로서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이 용어는 이사야 22:21과 욥 29:16에서와 같이 보호자(protector), 공급자(provider), 후원자(benefactor)를 의미하는 관용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d['y는 말은 ???(지나다, pass on; 나아가다, advance)라는 동사 어근으로부터 파생한 명사이다. 이 명사는 기본적으로 과거든 미래든 간에 계속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따라서 d['y는 여호와의 계속적인 존재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다(사 57:15; 64:8).


??라는 단어는 하나님, 즉 자신의 백성과 관계를 가지시는 여호와를 가리키는데 사용된다. ??는 생명을 주시는 분, 즉 생명의 근원이심을 뜻한다. 따라서 이 d['ybia}라는 이름의 메시야는 생명을 주시는 분, 혹은 구속자를 의미한다.


그의 "아버지"로서의 이름에 '영원"이 붙음으로 해서 그는 앞으로 태어날 분이지만 이미 있었고 또 영원히 있을 분임을 증언한다. 그는 하나님(아버지)이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단 7:9)라고 불려지는 것과 같이 영존하시는 자라고 불리워진다. 이는 장차 오실 메시야께서 바로 영원하신 창조자이시며, 선민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보호자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메시야의 영존성과 인류를 영원으로 인도하시는 부성적 사랑을 강조하는 것이며 그의 영원하신 신적 속성을 계시하는 것이다.


'평강의 왕'이라는 이름은 '평화로운 자'라는 뜻을 지닌 솔로몬이라는 이름을 넌지시 암시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시편 72편에서는 이 이름이 직접 메시야에게 주어졌다. 솔로몬의 통치 때에 신정국가가 외형적이고도 한시적인 평화를 누렸듯이, 그의 위대한 계승자요 예표의 원형(antitype)이신 메시야의 통치 때에는 진정하고도 영구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야곱의 축복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메시야가 실로(Shilloh), 즉 평화를 이루는 자로 불렸던 것이다.

미가 5:2, 1:2





영존한 아버지란 영원의 아버지란 뜻으로 위격적인 면으로서 아버지라 지칭하기 보다는 창조물과 하나님 간의 관계로서 아버지라 지칭함 같다.

본문에서 .....〃 〃〃 이라 할 것임이라(즉 불이워질 것이다)...는 칭호를 받을 것임이라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에게 오신 왕이 다스릴 왕국----이렇게 네 가지 이름 속에 오실 그 아기가 하게 될 모든 사역들이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약속된 왕은 기묘한 일을 모사하는 분으로 그 백성을 구원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그 모든 것을 성취하실 것이며, 영원하신 아버지로 영원토록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실 것이며, 평강의 왕으로 온전한 평화를 그 백성에게 주실 것입니다.



즉 성자는 본질 하나이신 창조주 아버지라는 말.... 이 말은 다시 말해서

성부와 성자의 위격을 말함이라기 보다는 만물의 아버지로써 본질로써 유일하나님이심을 보임이다.

위격으로 함께 계시지만, 한분 하나님임을 뜻함이다.

 

만약 스스로 있는 분의 이름을 가르쳐주신다면 "여호와", "임마누엘", "영존하시는 아버지", "기묘자" 등 의미를 가진 단어라야 합니다. ... 영존하시는 아버지이시라는 것은 이는 예수그리스도가 아버지라는 말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와 한 분이시란 말이다.

즉 영존의 아버지라 불리운다는 말로 통일체이신 유일하신 하나님의 본질성을 지칭하는 말이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는데, 기묘자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요 영존의 아버지라고 지칭을 받는다.

"그의 근본은 상고 태초이며(즉 영원부터), 잠 30 그 창조자와 창조자의 아들을 구분한다.

이를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보이셨고..

예수님은 또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혹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요 14:9)고 하심으로 자신이 하나님과 동등되심을 친히 말씀하셨다.

빌립에게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 증거하셨다.

창세전에 아버지와 가진 영화로써 지금도 영화롭게 하소서 요17:5




많은 사람들은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삼위일체의 아버지 하나님과 구별되므로 이 말 때문에 당혹해 한다. 그러나 여기서 아버지는 삼위일체의 한 위로서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이 용어는 이사야 22:21과 욥 29:16에서와 같이 보호자(protector), 공급자(provider), 후원자(benefactor)를 의미하는 관용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성부의 제일위와의 연결이 아닌 그리스도에 속한 것으로서, 원본은 통상적인 의미의 아버지를 의미함이라기 보다는, 주인 소유자로써 확대성경(Amplified Old Testament)에서의 설명과 같이도...`영원함의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따라서 영원한 분이시며 영원함을 가진 소유자로 그리스도를 아버지로 지칭하고 있다.


e 이사야는 메시야를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귀착시켜서 성부로 이끌었다기 보다는, 외적의 통전적 일체이신 유일자 하나님으로 우리의 본향적 눈을 열려줬다. 즉 기묘자는 전능자로서의 피조물인 창조세계에 대해서 아버지라는 말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와 그분의 영원하심을 나누시는 분이시다.







그는 누구인가의 영원한 화두....이사야 9:6~7

http://www.bibleclinic.net/clinic/bc2isa0906.htm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 하는데, "정사"라는 말을, 일반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무려 22개의 올림말이 올라 있는데, 우리 본문의 것은 열 번째에 나와 있는 "정사(政事)"이다. 정치 정 자에 일 사자를 쓴 것이다. 정사란 "정치상의 일" 곧 정치(政治)이다. 그런데, 정치를 어깨에 메었다는 표현은 우리말에서 흔한 표현은 아니다. "중책(重責)을 짊어지다"라는 표현을 상기하면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아기는 정치가로 혹은 통치자로 태어났다는 말이다. 장차 그 아기가 통치자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기묘자"라는 말은 아예 사전에도 없는 말이기는 하지만, "기묘(奇妙)"는 문자 그대로 기이할 기 자에 묘할 묘 자를 쓴 것이니까, "기이하고 묘한 것"이다. 그러니까, "기묘자"란 "기이하고 묘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모사(謀士)" 역시 올림말이 아홉 개가 나오는데 우리 본문의 것은 여덟 번째 나오는 "모사"이다. 꾀할 모에 선비 사 자를 쓴 것이다. 일을 꾀하여 처리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다.


또 그의 이름이 한 두 가지도 아닌, 네다섯 개나 되는데, 그 이름들마저도 보통 작명 과정에서 나오는 이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기묘자(奇妙者 the Wonderful)', '모사(謀士 the Counsellor)', '전능하신 하나님(Mighty God)', '영존하시는 아버지(Eternal Father)', '평화의 왕(Prince of Peace)' 이런 이름이다. 영어를 이해하는 독자를 위해 영어 번역을 병기하였다. 오히려 우리말보다 더 쉽게 이해되는 독자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이름들이, 어디, 사람에게 부칠 수 있는 이름들인가? 더욱이, 여인의 태를 통하여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그 아기의 이름이 "하나님"이라니? 이제 막 태어난 갓난아기의 이름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니? 왕궁에서 나기는커녕, 오히려 가축의 구유에서 태어난 평민의 아들이 "평화의 왕"이라니? 구약에서는 이름은 그 이름을 가진 이의 본질이다. 그러기에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주님은, 아기이고, 아버지이고, 왕이고, 하나님이다.


구세주로 오시는 아기를 단순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만 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이라고 말하는 점에 있어서는 이사야 뿐만 아니라 신약의 요한복음서도 대단히 자극적이며 도발적이다. 예를 들면,



요한 1:18 "일찍이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나, 아버지의 품속에 계시는 독생자이신 하나님이 그분을 나타내 보이셨다."

요한 20:28 "도마가 예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 하고 대답하니",

롬9:5 저는 만물 위에 계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요한일서 5:20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그 참되신 분을 알 수 있도록, 우리에게 이해력을 주신 것을 압니다. 우리는, 그 참되신 분,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이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


우리는 이사야서 9장 6-7절의 이 어마어마한 본문의 뜻을 한꺼번에 다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이 어떤 분인가를 오늘부터 시작해서라도 남은 생애 동안 우리가 계속하여 명상하자는 뜻에서 이 본문의 말씀을 소개하고, 이 말씀의 주인공이신 그리스도, 그 분이 누구인지, 그가 누구이기에, 우리는 평생 그에게 붙잡혀 있는 것인가? 그가 누구이기에 우리의 평생을, 아니 우리가 죽은 뒤에도 영원히 우리와 관계를 맺으시는 (분) 것인가?



e

'기묘자(奇妙者 the Wonderful)', '모사(謀士 the Counsellor)', '전능하신 하나님(Mighty God)', '영존하시는 아버지(Eternal Father)', '평화의 왕(Prince of Peace)'

기묘자--경륜을 이루는 자, 말할 수 없는분

모사---계획을 성취시키는 자

전능하신 하나님---외적 통적적 하나님의 본질(일체자)

영존하시는 아버지---창조물 적으로, 성부와 일체된 자로서의 격위, 그 분(성자)을 영존의 아버지까지로 호칭을 높여 놓음을 통하여, 성부와의 관계에서 일체되신 성자임을 부정 못하게 못 밖아 놓은 구절이다.

바로 신약 요한의 저술에서 내안에 아버지가 아버지가 내 안의 비분리성을 이미 구약서 천명하고 있씀이다.

평화의 왕---그 분의 사역의 특성




전능하신 하나님과 나  작성자:조지 뮬러

http://book.christian.or.kr/multiboard/webboard2/view30.asp?num=1134&topcode=2


이 구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人性)과 신성(神性)을 보여 줍니다.





그렇게 되면 그 왕의 이름을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습니다; 기묘한 것을 모사하는 자,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 이 이름들은 우리에게 오신 왕,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실 일들을 너무나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1) 기묘한 것을 모사하는 분 (Wonderful Counselor)


먼저 우리의 왕이 하시는 일은 계획을 세우는 일입니다. 특히 그 백성이 위험에 처해 있을 때 그들을 구원하기 위한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왕의 첫번째 이름이 ?기묘한 것을 모사하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나신 예


(2) 전능하신 하나님 (Mighty God)


왕이 아무리 좋고 놀라운 계획을 세워도 그것을 성취할 능력이 없다면 그 백성에게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우리

(3) 영존하시는 아버지 (Everlasting Father)


은 왕들이나 권력자들이 그 왕권이나 정권을 얻기 전에는 백성들을 잘 섬기겠다고 하지만 대부분이 권력을 차지하고 나면 그 백성에게 진정한 고통거리가 되고 맙니다. 그 당시 왕들, 그리고 역사 가운데 너무나 많은 왕들은 백성을 돌보기는커녕, 자신의 사치와 쾌락, 욕심을 위하여 백성들을 착취하고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오실 왕은 그런 왕이 아닙니다. 그래서 그 다음 이름이 ?영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그 이름의 의미는 그가 영원토록 아버지처럼 우리를 돌보시리라는 것입니다. 아버지처럼 자기 자녀들의 행복과 평강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사랑과


[4] 우리에게 오신 왕이 다스릴 왕국


이렇게 네 가지 이름 속에 오실 그 아기가 하게 될 모든 사역들이 언급이 되고 있습니다. 약속된 왕은 기묘한 일을 모사하는 분으로 그 백성을 구원할 놀라운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그 모든 것을 성취하실 것이며, 영원하신 아버지로 영원토록 당신의 백성을 보호하실 것이며, 평강의 왕으로 온전한 평화를 그 백성에게 주실 것입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를 .....여러 표현중에 하나로 볼 것인가? 하나로 독립화 시킬 것인가에 문제점이 있다.



예수님의 탄생과 예언   사 9:6 ~ 9:7 (NIV)

http://www.davidcho.com/NewKor/sermon.asp?id=40


<서론>


예언은 그것이 성취된 후에야 참인지 거짓인지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 예언이 100년후에 일어날 예언이라면 적중하기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더구나 그 예언이 600-700년 후에 일어날 것이라면 인간적인 예측은 아득히 뛰어넘는 것으로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외에는 그런 예언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예언은 구약 성경 전면에 걸쳐 약 300여번 있다고 합니다. 그 중에도 이사야는 주전 600-700년 전 선지자로 예수님의 탄생과 고난에 관하여 현장에서 본 것보다 더 명확히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담대히 외쳤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4. 그 이름은 영존하시는 아버지

- 아버지란 내게 생명을 전하여 주신 분입니다. 예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은 직접적으로 십자가에서 나를 대신하여 죽으셔서 죄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사 나의 영생의 근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1) 예수님만이 하나님 아버지를 구체적 보여주셨음 *(요 1:18)

2)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는 일체이십니다. *(히 1:3)

3) 종교가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생명의 아버지이심으로 예수님을 모시면 거듭나고 영생을 얻게 됨

4) 영존하시는 아버지 *(사 63:16 참조)

- 세상 아버지는 생명이 유한함으로 육신의 자식을 항상 돌봐줄 수 없으나 예수님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심으로 영원히 함께 계시고 돌봐 주심




    1.기묘하신 모사(지혜)이신 하나님

      기묘자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모든 피조물의 흠모와 놀라움의 대상

                          그는 인간으로 오셔서 인간들의 상상을 초월하신 능력을

                          보이심으로써 노라움의 대상이됨

      인간이 해결 할 수 없는 일이라도 기묘자이신 예수님을 믿고 따르면 놀라운 기적으로

      해결하여 주신다.

        사40: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모사는 성령님에게 붙여진 별칭인 '보혜사'와 거의 유사한 의미가 있다. 성령님은

   영으로 오셔서 성도들의 보혜사가 되시고, 예수님은 몸으로 오셔서 보혜사의 역?을 하심

   인간들은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없는 진리을 가르쳤다.  그러나 모사이신 하나님은 고통,

   있는 우리에게 고통에서 해방되는 길을 우리에게 보이셨다.

 



[스크랩 글] 안상홍증인회(안증회)-예수님은 누구인가? 조회 9    추천    스크랩 0 

<안상홍은 예수는 야훼이다. 단일신적을 주장한다....(e)>

http://blog.empas.com/sapmenjs/3113272

http://blog.naver.com/reformation1/4803019 

 

예수님은 누구인가? 

4세기에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의 신성에 대한 논란은 끊임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성삼위일체다?, 또 어떤 이들은 ?성삼위개체다?라는 등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구약 성경을 볼 때 자신을 가리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여호와 하나님 한 분뿐입니다. 그 여호와 하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실 때 ?예수?라는 이름으로 오셨기 때문에 ?너희가 나를 알았다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하신 것입니다.



근본 하나님이시면서도 육체를 입고 계시는 동안에는 하나님의 아들로 활동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하나님 섬기는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님

빌 2장 5~8절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그리스도 예수는 우리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로서 임하신, 육체로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구약시대 선지자들은 ?여호와의 신?이 자신들에게 임하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에게 임하여 장래 일을 예언하신 분도 그리스도시며, 다윗을 빙자하여 말씀하신 그 여호와의 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영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님은 한 분이십니다.


지금까지 예수님에 대해 성경에 예언된 많은 내용들 중의 일부를 연구해 보았습니다. 영생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서야 어찌 ?하나님을 안다?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One True God 1 하나님의 존재를 알기위해서 우리의 작은 믿음이 하나님을 "보는" 믿음으로 성장되어야 합니다. ... 즉, 그에게는 영존하는 삶이 있습니다(딤전6:16). 따라서, 하나님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사9:6), "영원하신 하나님" (신33:27)이라고 불립니다 ...




그의 아들의 이름

(His Son's Name)

http://www.kacr.or.kr/library/itemview.asp?no=640¶m=

Henry M. Morris 


'하늘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자가 누구인지, 바람을 그 장중에 모은 자가 누구인지, 물을 옷에 싼 자가 누구인지, 땅의 모든 끝을 정한 자가 누구인지, 그 이름이 무엇인지, 그 아들의 이름이 무엇인지, 너는 아느냐' (잠언 30:4).


선지자 아굴(Agur)(잠언 30:1)이 특별히 깊은 관심을 가지고 알고 싶어하던 이름은 물과 바람과 그리고 땅의 모든 끝을 정하신 바로 그 우주창조의 주재자의 아들의 이름이었다.


다윗이 노래한 시편 2장에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의미심장한 언급이 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시편 2:7, 8).

- 특히 '하나님 (Elohim)'과 '주님(여호와)' 그리고 '주님(Adonai)' - 틀림없이 친숙하였으면서도 새삼 창조주의 이름을 물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 아들의 아버지로서 그의 또 다른 이름이 있어야만 했다. '그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렇게 아굴은 물었던 것이다.




재판과 십자가형이 집행되기 바로 전날 밤에 그는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아버지여 …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 의로우신 아버지여 …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저희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 '(요한복음 17:1, 6, 11, 25, 26) 하셨다. 그 이름은 명백히 '우리 아버지'였다. 주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의 방법을 가르쳐 주실 때, 특별히 기도 서두를 '우리 아버지'로 시작할 것을 일러 주셨다. (마태복음 6:9).


'아버지' (희랍어로는 pater)라는 단어가 신약성경에서는 약 500번 보이는데, 인간의 아버지들은 물론 하나님을 지칭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와 사도들 모두가 빈번히 사용하였다. 한 번은 긴급한 상황에서 주 예수는 당신의 아버지에게 기도를 드릴 때, '아바 아버지여(Abba, Father)' (마가복음 14:36)하고 불렀다. 이 기도는 그의 체포가 있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있었다. 비록 구약성경에서는 하나님에게 '아바' 라고 불렀던 사람은 없었지만, 그리스도는 그렇게 불렀던 것이다. 이것은 삼위일체 神格의 제일 깊숙한 자리에 앉아 계실 당신의 아버지를 부르는데 더없이 친밀한 호칭임에 틀림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이름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는 또한 인류의 위대한 모사로서 타락한 인간성을 되찾아주는 하나님의 사랑의 본성을 완벽하게 전해줄 수 있는 분임이 틀림없다. 인간-하나님이신 그가 마침내 이 땅에 오셨을 때 어린아이와 같이 단순하지만 무한히 지혜로운 뜻을 담아 모든 사람들이 이해하기 쉬운 표현으로 말씀하셨다. 심지어 하나님의 적들까지도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 사람의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 (요한복음 7:46)하고 탄복하였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의 이름이 '전능하신 하나님' 임을 또한 주목하여야 한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로 인해서 그가 神格 중에서 (삼위일체 가운데서) 두 번째의 위치에 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육화 이전의 '그는 하나님과 동등하였다' (빌립보서 2:6). 심지어 그는 스스로 해(害) 받음을 허락하신 다음에도 그는 죽음 그 자체를 정복하였기에 '…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태복음 28:18) 라고 선언할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또한 '영원하신 아버지' - 또는 수많은 권위자들이 번역한 바를 따르면 '영원의 하나님' 이기도 하다. 그는 공간과 물질은 물론 시간의 창조자다.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골로새서 1:16), 그리고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3). 그리고 비록 그가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었지만, 그는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한복음 10:30) 라고 선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또 다른 이름으로 불러야만 할 요소가 있는데, 그것은 '평화의 왕자 (The Prince of Peace)'의 자격이다. 비록 그는 하나님이시지만, 그는 또한 인간이다. 그러므로 그만이 유일하게 '하나님과 인간과의 사이를 중재할 수 있는' 성공적인 참 중보가 될 수 있다 (디모데전서 2:5).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고린도후서 5:19) 세계에 참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는 '…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골로새서 1:20). 그러므로 '그는 위대한 화평케 하는 자' 이시다 (마태복음 5:9).


이 다중차원의 이름들이 어찌도 영광스러운지요! 그런데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하나님/인간이신 바로 이 분에 관해서 언급하면서, 예레미아 선지자는 '…그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 (예레미아 23:6) 라고 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고린도전서 1:30). 하나님


'예수 (Jesus)' 라는 이름은 이사야와 예레미아가 예언하였던 고매한 이름보다는 훨씬 단순한 이름 같이 보인다. 유대인들 중에서 이미 그 이름 - 여호수아, 이사야, 호세아, 예수아 (Joshua, Isaiah, Hosea, Jeshua) - 로 알려진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 이름들은 모두 다 바로 그 이름의 변형이다. 그러나 그 이름은 이 모든 이름들을 포용한다는 것을 안다면 놀랍다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이 이름이 단순히 '여호와께서 구원하시리라' 또는 '우리의 구주 여호와' 라는 뜻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라는 이름은 하늘에 계시는 그의 아버지가 그에게 부여한 인간의 이름이다. 그리고 그 이름은 타락한 세상과 죄에 빠져 용서와 화평과 영생을 소망하는 남자와 여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그의 총체적 전도사역을 내포한다.


아직도 남은 이름들이 더 있다. 신약성경에서는 그의 이름이 신약의 최초의 장에 언급되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태복음 1:16). 이를 보면 그는 예수라고 불렸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라고도 불렸다.


즉, 그는 바로 그 '그리스도 (the Christ)'로서 이스라엘이 장구한 세월 기다리던 '메시아(Messiah)' 임을 알 수 있다. 이 두 이름은 실질적인 직함으로서, 희랍어와 히브리어로서는 각각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뜻한다. 육신을 입은 그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당신의 영원한 선지자, 제사장, 그리고 왕으로서 기름부음을 받았던 것이다. 우리의 영원하신 선지자이그는 '육신이 된 하나님의 말씀' (요한복음 1:1, 14) 이 되어 우리들에게 '아버지와 아버지의 뜻을 세세무궁토록 선언하신다' (요한복음 1:18). 우리의 위대하신 대제사장 되신 그는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히브리서 7:25). 마침내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요한계시록 19:16). 다. 그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이신 예수일 뿐만 아니라, 주님 (Lord)이시다. 그의 부활이 있은 후, 베드로 사도는 그러므로 믿는 자들에게 그의 온전한 이름은 언필칭 '주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 이 세상에서 살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His Name Is Called the Word of God)

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요한계시록 19:11). 그는 지금도 우리들의 '충성된 대제사장'(히브리서 2:17) 되시고, '미쁘신 조물주' (베드로전서 4:19)가 되시며, 그리고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요한계시록 3;14) 이다. 그의 영원한 이름 중의 하나는 충성되고 참되신 이 이시다. 그리

그 다음에 우리는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요한계시록 19:13)의 말씀을 알고 있다. 그는 '태초의 창조하시는 이름' (요한복음 1:1-3)이었다. 그리고 '육신이 되어 우리한테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 (요한복음 1:14)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가 원수를 이기고 우리 지구에 개선하실 때 다 이루심을 나타내는 장엄한 승리의 말씀이다.


그러고도 마지막 남은 이름이 있으니, 그것은 그가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요한계시록 19:16)가 되심이다. 그

아굴이여, 여기 그대에게 줄 대답이 있소. '그의 아들의 이름 (His Son's name)'은 믿을 수 없을 만치 위대하여, 그 이름을 다 일컫는 데는 필설이 부족할 것이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 (Wonderful)' 말고도 우리가 그의 말씀 속에서 볼 수 있는 모든 아름다운 이름들이며, 또한 틀림없이 영원의 시간 중에서 더 많은 이름들을 가지게 될 것임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이사야서 9:6-7에 나타난 메시야의 신성에 관한 연구

권오윤 (ACTS Th.D과정 구약 전공)

http://www.actscomi.net/is9.html

여 말하고 있다. 이 아이는 여러 이름 속에서 신적인 분이요, 하나님 그 자신임을 가리키고 있다. 그는 생명의 근원이심을 말함으로써 구속자이심까지도 증언한다. 또한 이 구절들은 메시야의 영원성까지도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이 본문은 보는 관점에 따라 많은 학자들이 각기 다른 다양한 해석을 시도해 왔다. 유대교에서는 이 본문에서 '한 아들'로 태어나는 메시야가 하나님으로 지칭되고 있다는 사실에 심한 당혹감을 느꼈다. 인간이면서 하나님으로 불리어지는 것이 그들의 교리 체계와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Rash, Kimchi 같은 유대교 학자들은 이 구절을 히스기야 왕에 관한 예언으로 간주하였다. Mowinckel은 이 구절은 신적 메시야에 관한 예언이 아니고 단지 한 왕자의 출생고지라고 이해한다. 2) 그와 같은 입장에서 Lindblom은 이 5절은 히스기야와 동일시하는 임마누엘의 육체적 출생에 관한 고지로 해석한다. 3)


반면에 존 F. 소여는 이 본문은 왕권적인 언어로 기록되어 있으며 예루살렘에서 거행되는 대관식을 위하여 저작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라는 문구는 왕가의 상속자가 출생했을 때가 아니라 상속자가 왕위를 계승하여 왕좌에 오를 때에 부른 노래라고 본다. Otto Kaiser 역시 이사야 9:5에서 "우리에게 한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은 시편 2:7절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왕이 즉위하는 때 하나님이 그를 받아들였음을 우회적으로 표현하는 어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R. B. Y. Scott도 9:2-7이 왕위 즉위식에 사용된 노래라고 본다. 그는 이 본문은 아하스 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히스기야 왕의 즉위식 때 그를 이상적인 왕으로 높이기 위해 불려진 대관식 노래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입장에서 이형원은 본문에 사용된 신적인 용어들은 왕을 높이기 위한 비유적 표현들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러나 교리적 편견과 그릇된 신학적 전제가 아니고서는 누구라도 히스기야 왕을 이 예언의 주제로 볼 수가 없다. 무엇보다도 히스기야를 지목하는 해석이 그릇되었다는 결정적인 근거는 여기에서 번영을 약속한 예언이 유다 왕국에 관한 것이 아니라 주로 갈릴리 지방이 영화롭게 되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갈릴리는 북방의 열 지파의 왕국에 속한 지방으로서 히스기야는 그 지방을 통치한 일도, 그 지방에 영향을 미친 일도 없었다. 본문에 제시된 여러 가지 속성들은 이 왕이 히스기야나 다른 어떤 이 땅의 통치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강력하게 증거해준다.


이사야 9장의 '다윗의 보좌'에 앉아서 영원히 다스릴 '한 아기'의 탄생 예언은 결코 단순한 인간의 왕이 아니라 신적인 왕으로 다스릴 메시야되신 예수님의 탄생을 가리킨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본 논문은 이사야 9:6-7을 중심으로 이사야를 통해 예언된 메시야의 신성에 관하여 주석적으로 논증해 보고자 한다.



"그들이 큰 빛을 보았다", "빛이 그들 위에 비췬다"라고 표현하고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렇게 표현하는 이유는 1. 아직 실제로 구원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며, 2. 그들이 비록 아직 어둠 가운데 있지만 그들이 빛을 바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이 빛은 과연 무엇인가? 이 빛은 여호와 하나님을 가리킨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본문에서 두 구절의 동사가 이 모두 완료형으로 쓰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이 이 아이의 탄생은 미래에 일어날 사건이 아니라 이미 발생한 것으로 간주한다. 즉 동사의 완료형태는 선지자가 아하스 왕 시대의 어려운 정치적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상징적으로 보여 줄 아기가 이미 출생했음을 선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이와 더불어 뒤에 나오는 동사 ar;q]YIw"""(and he called)와 관련하여 이 구절은 새로운 통치자의 즉위식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주장도 자연스럽게 등장한다.


그러나 이 두 동사는 예언적 완료형이다. 완료형으로 쓰인 것은 예언의 확실성을 나타낸다. 칼빈은 이렇게 미래의 사건을 과거시제로 표현하는 이유는 바로 백성들의 면전에서 그 사건을 생생하게 펼쳐 보이는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즉 이것은 미래형을 써서 막연한 미래에 대한 가상적인 예언을 주기보다는, 완료형을 사용하여 어떤 정해진 때에 이미 이것이 이루어진 것을 말하는 역사적인 확실성을 보장하기 위한 의도인 것이다.



왕적인 아이-

이 예언에서는 선지자에게 메시야가 다른 예언에서처럼 종의 형태로가 아니라 영광 가운데서 나타난다.


/mk]viAl[' hr;c]Mih' yhiT]w"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이는 한 왕국의 고통과 이를 수행하기 위한 탁월한 모든 업무를 홀로 맡아 수행하는 메시야의 왕적권위를 나타낸다. 즉 메시야께서 세상의 다른 군왕들과는 달리 스스로 모든 짐을 담당하시고 탁월하고 성실하게 통치하실 것임을 예언하는 말씀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이름들- 그러나 본문을 인간 왕의 즉위식으로 해석하는 대부분의 학자들은이름들의 상호 관계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못함으로써, 물론 그 이름 가운데 어떤 것들은 사람에게 적용 가능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이름들의 상호 관련성으로 볼 때에 그것들이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간과하는 실수를 범하고 있다.


/mv]는 단수이다. 이 이름들은 불리어지기 위해 쓰여졌다기보다 차라리 그 아이의 특성을 묘사하기 위해 붙여진 것이다. 이 아이가 어떤 존재인가를 분명하게 하기 위하여 일곱 개의 용어들이 사용된다. 이들 각각에 대한 광범위한 논의는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낳았다. 그러나 맛소라 본문이 자료를 제시하는 방법 - 분명히 각각 두 단어로 구성된 이름, 본문에서의 배치 균형 등을 생각해 볼 때, 네 개의 이름들로 보는 것이 가장 정확한 것 같다. Young은 Herntrich를 인용하여 각 이름들의 한 단어는 세상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형이상학적인 차원의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네 가지는 위대한 이름들이다. 보통 인간에게는 도저히 붙여질 수 없는 초인간적인 명칭들이다. 따라서 이 이름들의 대상자는 메시야 외에는 달리 생각될 수 없다.



$[e/y al,P,(기묘한 모사자, wonder of counsellor)


'al,P,'(wonder)와 '$[e/y'(counsellor)를 구분하여 각기 독립된 명칭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으나,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하나의 명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e/y al,P,에서 앞의 al,P,는 명사로서 연계형이다. 따라서 al,P,가 $[e/y를 꾸며 주는 것이 아니라 정반대이다. 그러므로 'Wonderful Counsellor'보다 'Wonder of Counsellor'로 번역하는 것이 좋겠다.


al,P,는 무엇인가 특별하고 예외적이며,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경이요 기적이라는 의미에서 놀라움이다. 동사로 취급되었을 때, 이 말은 한 사건의 빼어난 성격 다시 말해 경이롭고 기적 같은 것을 표현한다. 구약에서 이 단어는 사람에게는 전혀 쓰이지 않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나타낼 때만 사용되었다.


이사야는 다른 문맥들에서도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사야는 애굽으로부터의 이스라엘의 위대하고, 기적 같은 구원을 기이한 일로 언급하고 있는 모세의 노래에서(출 15.11) 이를 인용하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는 자연과 삶 속에서 일어나는 기이한 일들을 지적하면서, 이 모든 일들이 여호와, 즉 '모사가 기묘하며'(wonderful in counsel), 지혜가 광대하신, 주권자이신 그 분(the sovereign one)으로부터 비롯됨을 지적한다(사 28:29).


또 이사야 29:14에서는 여호와께서 그분의 기사들로 자신의 백성들을 어떻게 놀라게 하실 것인가를 표현하는 데 이 단어가 세 번씩이나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이 백성 중에 기이한 일(aylip]h'l]) 곧 기이하고(alep]h') 가장 기이한 일(al,p,w:)을 다시 행하리니 그들 중의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 명철자의 총명이 가리워지리라"(사 29:14).


이 명칭은 시편 78편에서 하나님께서 스스로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몸소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지칭하는데 사용된다.


"여호와의 행하신 것과 저희에게 보이신 기사(Iwyt;/al]p]nIw)를 잊었도다 옛적에 하나님이 애굽 땅 소안 들에서 기이한 일(al,p,)을 저희 열조의 목전에서 행하셨으되"(시 78:11-12)


12절 이하에 묘사된 그의 기이한 일(al,P,)은 애굽 땅에서 행하신 일들, 바다를 가르신 일,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신 일, 반석을 쪼개어서 물을 내신 일들을 예로 들고 있다. 이러한 것들은 인간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아름답거나 큰 일 정도가 아니라 초인간적인, 즉 신적인 일들이다.


사사기 13:18에는 마노아에게 나타난 주의 사자에게 이름을 물었을 때에 주의 사자는 이름을 'al,P,'라고 말하였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를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니라(.yalip,AaWhw ymiv]li)"(삿 13:18)


이것은 자신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초자연적이신 분이시며, 또 초자연적인 능력을 일으키시는 분이심을 암시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즉 나의 본성 전체가 이적적이요 신비로 가득하며, 그러므로 그 어떤 인간의 이름으로도 나를 부를 수 없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경에서 기이함(al,P,)은 여호와의 성품(신적인 경이, 또는 신적인 기묘)을 묘사하는 중요한 표현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메시야에게 사용된 "al,P,"는 '아름답다'는 수식어구이기 보다는 '인간이 이해할 수 없이 기이한' 신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 자신이 바로 그 능력의 일을 일으키는 본체임을 나타내는 말이다.


$[e/y(모사)는 '지휘자', '가르치는 자', '의존자'의 의미로서, 죄악된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완벽한 계획과 방법을 가지고 계신 메시야의 온전하신 지혜를 염두에 둔 호칭이다. 이 이름은 그가 인간능력의 범위를 벗어난 위대한 통치자이심을 나타내고 있다.


이 $[e/y al,P는 이사야 28:29에 바로 하나님에게 사용되었다(al,P,는 동사로 사용됨). 따라서 이 이름은 바로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그것을 메시야 왕이 할 것에 대한 증언인 것이다.


"이도 만군의 여호와께로서 난 것이라 그의 모략은 기묘하며(hx;[e aylip]hi) 지혜는 광대하니라"(사 28:29)


이상으로 미루어 볼 때 첫번째 이름은 여호와의 백성의 유익을 위해 태어날 그 아기 또는 아들의 신적인 성격과 능력을 표현하는 것이 분명하다. $[e/y al,P는 '인간성과 모든 자연의 법칙을 초월한 놀랍고 기적적인 분'을 의미하는 것으로 메시야의 존귀와 탁월성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d['ybia}(영존하시는 아버지라)------ 많은 사람들은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삼위일체의 아버지 하나님과 구별되므로 이 말 때문에 당혹해 한다. 그러나 여기서 아버지는 삼위일체의 한 위로서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이 용어는 이사야 22:21과 욥 29:16에서와 같이 보호자(protector), 공급자(provider), 후원자(benefactor)를 의미하는 관용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d['y는 말은 ???(지나다, pass on; 나아가다, advance)라는 동사 어근으로부터 파생한 명사이다. 이 명사는 기본적으로 과거든 미래든 간에 계속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데 사용된다. 따라서 d['y는 여호와의 계속적인 존재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된다(사 57:15; 64:8).


그의 "아버지"로서의 이름에 '영원"이 붙음으로 해서 그는 앞으로 태어날 분이지만 이미 있었고 또 영원히 있을 분임을 증언한다. 그는 하나님(아버지)이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단 7:9)라고 불려지는 것과 같이 영존하시는 자라고 불리워진다. 이는 장차 오실 메시야께서 바로 영원하신 창조자이시며, 선민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보호자 하나님이심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것은 메시야의 영존성과 인류를 영원으로 인도하시는 부성적 사랑을 강조하는 것이며 그의 영원하신 신적 속성을 계시하는 것이다.



.!/lv;Arc'(평강의 왕이라) -------- 솔로몬의 통치 때에 신정국가가 외형적이고도 한시적인 평화를 누렸듯이, 그의 위대한 계승자요 예표의 원형(antitype)이신 메시야의 통치 때에는 진정하고도 영구한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야곱의 축복에서도 이와 비슷하게 메시야가 실로(Shilloh), 즉 평화를 이루는 자로 불렸던 것이다.



마지막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에 대해서는 헤르더의 동시에 우상들에 대적하여 자신의 영광을 드높이시는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http://www.antioch.co.kr/Antioch/Bible01/View.aspx?Bible01Id=10 안티오크...

글쓴이     박만수

제   목     Genesis 1:1(2)-시간 속의 하나님



"내가 칙령을 반포하리라: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아들이니; 이 날 내가 너를 낳았다"(시 2:7). 

(I will declare the decree: the LORD hath said unto me, Thou art my Son; this day have I begotten.)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니, 이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느냐?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히 1:5).

(For unto which of the angels said he at any time, Thou art my Son, this day have I begotten thee? And again, I will be to him a Father, and he shall be to me a Son?)


이 두 말씀에서 "이날 내가 너를 낳았다"고 하신 것은, 창조주께서 피조 세계에 자신을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으로 계시하기 시작하신 날, 곧 시간이 시작된 시점을 가리킵니다. 히브리서 1장 6절이 그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이는 우리에게 한 아이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음이니, 정권이 그의 어깨 위에 있을 것이며,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분이라, 상담자라, 강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는 아버지라, 평화의 왕이라 칭함을 받으리라"(사 9:6).

(For unto us a child is born, unto us a son is given: and the government shall be upon his shoulder: and his name shall be called Wonderful, Counsellor, The mighty God, The everlasting Father, The Prince of Peace.)


이 말씀은 메시야에 대한 놀라운 예언으로서, 정확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에게 주어지신 바 되었는데, 신비하게도 그분의 이름은 "영존하시는 아버지"(The everlasting Father)로 칭함을 받게 되신다는 사실입니다. 아들 하나님이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칭함을 받게 되신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시간 속의 창조주의 계시라는 관점에서, "부자 관계성을 통한 사랑의 계시"가 피조물 중에서 유독 우리 인간을 위한 것이었음을 깊이 이해할 수 있다면, 아들 하나님이 아버지 하나님으로 불릴 수 있음도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일은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은 본질상 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영원 속의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시간 안에서 자신을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으로 우리 인간에게 계시해 주셨고, 다시 영원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아버지 하나님과 아들 하나님이 하나이신 것과 같이,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도 다 하나가 되어 영원무궁토록 하나님과 함께 거주하며 다스리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렇게도 간절히 소원하셨던 "거룩한 뜻"이며, 우리 주 예수님의 간절한 기도 제목이기도 한 것입니다(요한복음 17장). 


신성과 인성의 연합 [현재창]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 신성과 인성의 연합 요 1:1-18 예수님은 바쁜 전도 일정 중에 잠시 가나안을 벗어나 ... 말씀이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등으로 표현하였고, 신약에서는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기록하였습니다 ...

http://kimdi.net/Sermon/5.Chirst/2christ.htm (23k, 2004년 09월 21일)


구원의 복음 [현재창][클릭+]

"요한복음의 목적(1:1-18)" ... 예수님은 영존하시는 하나님 요한복음은 예수님께서 육신의 몸으로 오시기 전, 영원 전부터 ... 장 5절에 예수님을 가리켜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할 것이라 했고 미가 ... 미가 5:2, 1:2

http://www.christian.or.kr/menu03/word1-2.htm (12k, 2004년 08월 19일)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 -김윤구 목사-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혈육에 속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요 5:43) 라고 증거하셨습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은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안에 계시려고 그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습니다. 기록된바『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히 1:1-2) 하신 증거의 말씀대로 아들이 말한 것이 아니고 아들로 말씀하셨으며, 또한 아들이 만유의 주가 아니고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셨으며, 또한 아들이 모든 세계를 지은 것이 아니고 아들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과 그 아들에 관하여『저가 모든 원수를 그 발아래 둘 때까지 불가불 왕 노릇 하시리니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만물을 저의 발아래 두셨다 하셨으니 만물을 아래 둔다 말씀하실 때에 만물을 저의 아래 두신 이가 그 중에 들지 아니한 것이 분명하도다 만물을 저에게 복종하게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이에게 복종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만유의 주로서 만유 안에 계시려 하심이라』(고전 15:25-28) 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들을 낳으신 이도 아버지이시고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이도 아버지이시며 아들의 모든 원수를 그 아들의 발아래 두실 때까지 불가불 아들로 왕 노릇하게 하신 이도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므로 만물을 아들에게 복종케 하신 때에는 아들 자신도 그 때에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신 아버지께 복종케 되리라고 증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낳으신 아들이 그냥 후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아들을 아버지의 이름으로 세상에 보내셔서 순종함을 배워 온전한 아들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기록된바『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히 5:7-10) 하신 증거의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이 뜻을 따라『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라고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아들이『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요 5:19) 라고 증거하신 것입니다.


이러하므로『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 하면 이 교훈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내가 스스로 말함인지 알리라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요 7:17-18) 라고 말씀하시었고 또 다시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요 8:28) 라고 증거하신 것입니다.


이러므로 분명히『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요 8:42) 말씀하셨으며 또 다시『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요 14:10) 라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밝히셨으며 또한『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요 14:24) 라고 밝히 증거하신 것입니다.


예수의 증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는 아버지로 온 예수가 아니고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라는 것입니다. 이는 만물이 오직 아버지의 이름으로만 통일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하므로 아들의 영이『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저희는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내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저희를 보전하와 지키었나이다 그 중에 하나도 멸망치 않고 오직 멸망의 자식뿐이오니 이는 성경을 응하게 함이니이다』(요 17:11-12) 라고 아버지께 기도 드린 것입니다.


이러므로 선지자의 글에도『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라고 증거하신 것입니다.


곧 “한 아기가 우리에게서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라 하심은 혈육에 속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말씀하심이며 또한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라 하심은 곧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신 십자가를 어깨에 메셨다는 말씀이시고 또한 그 이름은” 이라 하심은 자기 이름이 아니고 아버지의 이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라고 증거하신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아버지로 온 예수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를 혼돈하고 있습니다. 이는 성경에『기록된바 하나님이 오늘날까지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롬 11:8) 하신 증거와 같은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주의 이름 곧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가 아닌 예수는 다른 예수입니다. 독생자를 주실 때도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셨고 맏아들을 이끌어 세상에 다시 들어오게 하실 때도 주의 이름으로 오십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예수께서『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마 23:37-39) 라고 진리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찬송하리로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오신 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아멘, 아멘. 주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