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 학

플라톤과 데미우르고스: 세계 설명과 세계 제작

- bada - 2005. 8. 9. 09:47
플라톤과 데미우르고스: 세계 설명과 세계 제작
이경직(천안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는 세계 제작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1부에서는 천문학적 설명이 나오고 2부에서는 4원소 이론과 그 이론을 응용한 화학 이론이, 3부에서는 생물학적 설명이 나온다. 그런데 오랫 동안 논란의 대상이 된 것은 바로 세계 제작자 데미우르고스의 정체이다. 데미우르고스는 1부에서 세계의 원인(aitia)로 등장하며, 세계의 아버지(pat r)로 불린다. 하지만 그는 2부에서 전면에 나타나지 않으며, 아버지라는 은유는 형상에 적용된다. 또한 2부에서 세계를 설명하는 세 가지 요인을 꼽을 때 데미우르고스는 들어가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1부에서 세계 제작자 데미우르고스는 완전한 모델인 이데아를 보고 세계를 제작한다. 이에 반해 2부에서는 형상이 제3의 종 수용자(hypodoch )와 직접 관계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와 관련해서 우리는 플라톤이 데미우르고스와 형상의 관계를 밝히려는 작업을 더 밀고 나가지 않았다고 여길 수 있다. 이후에 초기 기독교 사상은 이데아를 신의 생각으로 삼음으로써 데미우르고스와 형상의 관계를 자기 나름대로 설명하려 했다.


이 글에서는 논란이 많은 데미우르고스의 정체를 밝히려 한다. 그동안 플라톤 연구가들은 데미우르고스의 정체를 나름대로 밝히려 했다. 데미우르고스를 기독교의 신처럼 이 세계를 초월해 있는 신으로 이해하려는 학자들이 있다. 세계 영혼으로 이해하려고도 하고, 같음의 원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좋음의 이데아로 여기거나, 초월적 이성으로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들은 모두 불충분해 보인다. 이 글에서는 기존의 시도들이 불충분한 이유를 밝히는 소극적 작업보다 새로운 해석을 근거를 통해 제시하는 적극적 작업을 하려 한다.


이 글에서 입증하려는 테제에 따르면, 데미우르고스는 거의 독백으로 세계에 대해 설명하는 티마이오스를 나타내는 은유이다. 따라서 이 글의 저자 플라톤을 나타내는 은유이며, 더 나아가서 인간 오성을 나타내는 은유이다.


이러한 해석에 따르면, 세계는 인간 오성(또는 이성)에 의해 재구성되는 세계가 된다. 따라서 『티마이오스』의 우주 생성론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기보다 은유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티마이오스』의 세계 설명은 우주 생성론이 아니라 우주론이다. 존재론적 설명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인식론적 설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서두에 데미우르고스에 대해 중요한 언급이 나타난다. "이러한 전체(pan)의 제작자와 아버지를 발견하는 일은 힘든 일이며, 설령 그를 찾았다 하더라도 모두에게 그를 설명하는 일은 불가능하다."(Tim. 28c) 데미우르고스를 모든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 그 이유를 밝히는 설명들을 다루어 보자. 블래스토스(Vlastos)에 따르면, 데미우르고스의 활동은 이 세계에 적용되지 않고 임의의 세계에 적용된다. 그래서 데미우르고스에 관한 설명은 감각 세계에 관한 설명과 같은 종류가 아니다. 하지만 많은 플라톤 해석가들은 데미우르고스를 발견하기가 어렵다는 주장과 데미우르고스를 설명할 수 없다는 주장이 다르다는 점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멘(Menn)은 『티마이오스』 28c의 'legein'을 '설명하다'로 받아들이지 않고 '거명(擧名)하다'로 받아들인다. 펠리칸(Pelikan)에 따르면, 데미우르고스에 대한 설명이 어려운 까닭은 인간의 언어 자체에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의 언어가 우연과 연결된다는데 있다고 한다(Tim. 34c). 하지만 이러한 지적은 언어 일반에 적용되지 않는다. 도리어 감각 사물에 관한 언어에 적용된다. 『티마이오스』에서 설명과 설명 대상 사이에는 인식의 차이(epistemic difference)가 없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된 언급이 『티마이오스』 29b에 나타난다. "설명은 그것이 설명하는(eks g tai) 바로 그 대상과 친족(syngenes)이다". 여기에서 플라톤이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친족 개념은 설명과 그 대상의 관계를 설명해주는 핵심 개념이다. 『티마이오스』에 이와 비슷한 표현이 일부 나타난다. '친구'(Tim. 88d-89a), '형제'(Tim. 67e), '같은 것'이 그러한 표현이다. "친족은 동일한 것이다"(Tim. 63c); 『티마이오스』 79d에서 뜨거운 것은 자신과 친족인 것에로, 즉 뜨거운 것들이 있는 장소로 가려 한다. 이것은 "같은 것은 같은 것에로"(homoion homoi )라는 원리에 따르는 운동을 드러내는 사례이다; "모든 친족은 자신과 같은 것을 향해 간다"(Tim. 81a). '같은 것'(homoion)과 '동일한 것'(tauton)이라는 표현이 친족과 연결된다. 이러한 표현을 미루어 볼 때, 설명은 대상의 불완전한 모상이 아니다
(Phaid. 100a 참조). 어떤 언어가 우연과 연결된다면, 그 이유는 그 언어를 통해 설명되는 대상이 우연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파이드로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대화편에서 로고스는 세계와 마찬가지로 살아 있고 영혼이 있는 것으로 표현된다(Phaidr. 276a).
그런데 왜 데미우르고스를 모두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할 수 없는가? 플라톤의 소위 쓰여지지 않은 이론(ungeschriebene Lehre)을 전제하는 플라톤 해석가는 이곳에서 그들의 테제를 추가로 확증해주는 근거를 찾으려 한다. 그래서 가이저(Gaiser)에 따르면, 데미우르고스라는 생각과 연결된 어려움은 데미우르고스가 존재론적 전체 체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기능에 대한 물음에서 나오지 않는다. 도리어 데미우르고스에 대해 적합한 경험과 인식을 얻기가 어려운데 있다. 동시에 그는 플라톤의 존재론적 체계 전체 속에서 데미우르고스를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다. 플라톤에 따르면, 데미우르고스에 대한 설명에는 모순이 있다.

위와 같은 플라톤 해석가는 자신들의 생각을 뒷받침하려고 플라톤 철학을 대중을 위한 철학과 소수를 위한 철학으로 구분한다. 그들에 따르면, 소수의 사람만이 데미우르고스에 관한 설명을 이해할 수 있다. 소수의 사람은 플라톤의 쓰여지지 않은 이론을 아는 사람이다. 이와 관련하여 그들은 데미우르고스를 '모든 사람에게 설명하는 일'이 어렵다는 점을 강조한다. 또한 데미우르고스를 'arch '(기원)라고 부른다는 사실과(Tim. 28b), 세계의 기원 또는 기원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을(Tim. 48c) 끌어들인다. 그들에 따르면, 이러한 일은 다른 형태로만 이루어진다.


하지만 『티마이오스』에 나타난 'arch '의 의미는 문맥에 따라 다르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한다면, 위의 구절을 다르게 이해할 수도 있다. 『티마이오스』 28b에서 'arch '는 데미우르고스를 뜻할 수 있다. 하지만 『티마이오스』 48c에서 'arch '는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에 나타난 원소와 같이 근원적인 것이다. 더군다나 'arch '는 복수 형태로도 나타난다(Tim. 48c). 이를 미루어 볼 때 『티마이오스』 48c에서 'arch '는 데미우르고스를 뜻할 수 없다.

이 구절에서 논의되는 것은 세계의 시작, 즉 'arch '이지, 데미우르고스가 아니다.

또한 티마이오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학문적으로 훈련받은 사람들이다(Tim. 53c). 그 가운데에는 『국가』에서 이상 국가를 설명해 준 소크라테스도 들어 있다(Tim. 26e-27a). 더 나아가서 티마이오스의 설명 형태는 주로 대화가 아니라 강의이다. 이러한 형태를 고려할 때, 『티마이오스』를 아카데미아 내에서 이루어진 학문적 강의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티마이오스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교육받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학자이다(Tim. 27c-d). 『티마이오스』에서 기하학적 설명을 듣는 사람은 수학적 교육에서 탁월한 전문가이다. 그들은 소크라테스(Sokrates)와 크리티아스(Kritias), 헤르모크라테스(Hermokrates)이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크리티아스는 대화 참여자가 이야기하는 모든 점에서 능통한 사람이다. 또한 헤르모크라테스는 재능과 교육 덕분에 이러한 모든 일에 (물론 수학적 일에도) 자격을 갖춘 사람이다. 그들은 티마이오스가 기하학적 설명에 근거를 두고 하는 이야기를 따져 볼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사람들이다(hoi kritai, Tim. 29d). 로이드(Lloyd)에 따르면, 그리스의 의학은 일반인과 관련해서는 독단적이지만 전문가와 관련해서는 독단적이지 않다. 그런데 티마이오스는 의술을 설명할 때 독단적이지 않고 매우 관용적인 태도를 나타낸다. 이를 미루어 볼 때, 그의 설명을 듣는 사람은 티마이오스의 이야기를 판단하고 비판할 수 있는 (Tim. 54b) 학자이다.

더 나아가서, 티마이오스는 데미우르고스에 대한 설명이 어렵다고 언급한다. 하지만 그 후에 그는 데미우르고스가 세계를 제작할 때 이데아를 보았다는 사실이 모두에게(panti, Tim. 29a) 분명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도 플라톤의 쓰여지지 않은 이론을 끌어들이는 해석과 반대된다. 또한 『티마이오스』 안에서 쓰여지지 않는 이론과 반대되는 구절을 하나 찾을 수 있다. 『티마이오스』 27b에서 플라톤은 언어가 기록의 보존자 역할 하는 것을 높이 평가한다. 그는 기록의 파괴자를 부정적으로 평가한다. 이와 관련해서 크리티아스는 기록이 없는 아테네인과 기록을 보존한 이집트인을 대조시킨다(Tim. 23a-c, Krit. 109e-110b).


그런데 설명을 통해 데미우르고스를 파악하는 일은 왜 그렇게 어려워야 하는가? 이제 우리가 다루어야 할 물음이다. 여기서 우선 데미우르고스와 천문학자 티마이오스(Tim. 27a)가 서로 닮은 점에 주목해야 한다. 티마이오스는 한 인간, 즉 『티마이오스』에서 그 생성과 본질을 설명해야 하는 인간 종(種)의 한 예이다. 그뿐 아니라 구성하는 입장에서 서서 세계를 설명하는 인간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는 세계 안에 있을 뿐만 아니라 세계밖에도 있다.


이 글에서는 데미우르고스가 티마이오스를 나타내는 은유라는 테제를 내놓으려 한다. 이러한 테제는 가다머(Gadamer)와 가는 길은 다르지만 결국 같은 결론에 이른다. 그 결론에 따르면, 데미우르고스가 세계를 만드는 일은 인간이 세계를 인식하는 일과 같다. 멜링(Melling)은 이러한 테제를 지지해주는 본문 전거를 찾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게 은유적으로 해석하는 경우 경제적이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이와 관련하여 로젠(Rosen)은 플라톤이 『티마이오스』에서 신의 목소리로 이야기한다고 주장한다.


 데미우르고스를 나타내는 명칭이 벌써 이러한 테제를 지지해준다. 데미우르고스는 제작자(poi n, Tim. 31b, 76c)이다. 또한 많은 구절에서 그의 행위를 '만드는 일'이라고 부른다(poieien, Tim. 31b, 31c, 34a, 34b, 35b, 36c, 37d, 38c, 40a, 71d). 또한 그는 만드는 자(poi t s, Tim. 28c), 아버지(pat r, Tim. 28c, 37c, 41a, 42e, 71d), 낳는 자(genn sas,  Tim. 37c, 41a), 구성하는 자(synhistas, Tim. 29e, 30b, 30c, 36d), 신(theos)으로 불린다. 'synhistanai' 동사는 『티마이오스』의 많은 구절에서 데미우르고스와 같이 등장한다: Tim. 29e, 30b, 30c, 31a, 31b, 32b, 35a, 41d, 48a, 53b, 69c, 71b, 73e, 74d, 75a, 78c. 이러한 명칭은 자연 철학자 티마이오스에게도 적용된다. 또한 데미우르고스의 행위를 가리키는 동사가 많은 경우 수동 분사의 형태로 사용된다(d miourgein, m chanasthai, kermatizein,
diaspeirein). 이러한 경우 누가 이러한 행위의 주체였는지는 밝혀지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주체가 데미우르고스일 수도 있고 티마이오스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는 또한 이성과 의지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이는 데미우르고스뿐 아니라 티마이오스도 가리킨다.

 

1 poi t s

소크라테스는 티마이오스를 poi t s라고 부른다(Krit. 108b). 이러한 의미에 비추어 볼 때, 『티마이오스』은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어야 한다. 이는 poi t s에게 적합한 의사 소통 형태이기 때문이다. 모방(mim sis)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행위(ergoi)와 말 또는 설명(logoi)이 그것이다(Tim. 19e). 독백 형식은 말에 있어서의 모방이다. 이는 데미우르고스의 작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데미우르고스는 그의 로고스에서만 세계를 만든다. 이와 관련하여 『티마이오스』 서두(19c-20d)에 소크라테스가 poi t s에 대해 내리는 판단이 주목을 끈다.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poi t s를 두 부류로 나눈다. 티마이오스가 속하는 부류와 소피스테스들이 있다(Tim. 19e). poi t s는 모방하는 자이다(Tim. 19d). 모방된 작품이 좋은지는 모델이 좋으냐에 달려 있다. 모방된 작품이 좋으려면 전제 조건이 두 가지 있다: 좋은 모델이 있어야 하고, 모방자는 이러한 모델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전제 조건 가운데 소피스테스는 둘째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다(Tim. 19e). 이에 반해 티마이오스는 적합한 poi t s이다.

그의 모델이 이데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크롭세이(Cropsey)는 티마이오스를 이성적인 poi t s라고 표현한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티마이오스는 두 가지 전제를 모두 충족시킨다. 이러한 점에 비추어 볼 때, 패터슨(Patterson)처럼 티마이오스가 모상을 만드는 일과 '좋은' 모상을 만드는 일을 구분하지 않는다고 주장해서는 안된다. 적합한 poi t s인 티마이오스에게 있어서 모상을 만드는 일은 '좋은' 모상을 만드는 일이다. 이에 반해 소피스테스의 모델은 변하는 것이며 생성된 것이다(Tim. 28c-29d). 그래서 그의 모방 결과는 나쁘다. 물론 그의 모방능력은 탁월하다. 하지만 모방 능력이 뛰어나도 모방되는 모델이 나쁘다면, 모방을 잘 할수록 나쁜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티마이오스가 poi t s로서 활동한 결과는 세계에 대한 설명이다(Tim. 27b, 27c). 이는 데미우르고스가 세계를 구성하는 일과 일치한다. 데미우르고스도 이데아의 모상(eikon)을 만든다(Tim. 37d).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세계가 poi t s의 작품, 즉 제작물이 아니라는 자나웨이(Janaway)의 주장은 맞지 않다. 자나웨이의 논증에 따르면, 데미우르고스는 예술가가 아니라 직공이다. 하지만 『티마이오스』에 나타난 poi t s 개념을 이러한 의미에만 머무르게 할 수 없다. 『티마이오스』에서 예술을 적극적으로 평가하지 않는다는 설명도 맞지 않다. poi t s는 시적인 것을 높게 평가한다(Tim. 19d). 그래서 우리는 데미우르고스의 작업이 존재론적 영역에 자리잡는 반면에, 티마이오스의 작업이 인식론적 영역에 자리잡는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설명이 설명 대상과 친족 관계(syngenes)에 있다는 것도(Tim. 29b) 이와 연결된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데미우르고스가 티마이오스를 나타내는 은유라는 생각에 가까이 다가서게 된다. 데미우르고스는 하나의 세계를 만든다(Tim. 31b). 그런데 이 때 그 근거는 데미우르고스 작업의 독특성에 있지 않고 티마이오스의 입장에 있다.


2 데미우르고스와 티마이오스에게 나타난 또 다른 유사점
 

데미우르고스가 티마이오스를 나타내는 은유라는 테제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또 있다. 데미우르고스를 나타내는 표현은 티마이오스를 나타내는 표현과 많이 일치한다.

크리티아스의 설명에 따르면, 티마이오스는 전체의 상태에 관한 지식을 만드는 poi t s이다(Tim. 27a). 티마이오스도 자신을 그렇게 이해이다(Tim. 27c). 이와 마찬가지로 데미우르고스도 전체를 만드는 poi t s이다(Tim. 28c); 티마이오스에 따르면, 원상과 모상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다(Tim. 49a). 이로 미루어 볼 때, 『티마이오스』 1부도 그의 구성물이다; 소크라테스는 이상 국가가 동물처럼 '움직이는' 것을 볼 수 있었으면 하고 원한다. 이러한 소망은(Tim. 19b) 티마이오스의 이야기에서 완전하게 실현될 수 없다(Tim. 26a). 동물인 세계를 완전한 운동을 통해 나타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는 전체를 가장 잘 만들려는 데미우르고스의 소망에도 적용된다(Tim. 30a, 30b).


다른 대화편을 보면, '아버지'라는 표현은 데미우르고스에게뿐 아니라 poi t s에게도 사용된다(Theait. 164e, Phaidr. 257b). 이와 관련해서 프로클로스(Proklos)는 티마이오스의 이야기를 데미우르고스의 이야기와 같게 여긴다; 또한 '데미우르고스'라는 표현은 '수호자'라는 표현과 함께 나타난다. 물론 데미우르고스의 지위는 『국가』(Politeia)편에 나타난 수호자의 지위보다 높다. 그레헴(Graham)에 따르면, 데미우르고스는 이데아의 존재론적 우선성을 강조해야 한다. 소크라테스가 티마이오스를 철학자라고 표현한 것도 이와 연결된다(Tim. 20a). 네슬레(Nestle)에 따르면, 그리스인이 보기에 제작자들 또는 데미우르고스들은 지혜로운 사람에 속한다. 그외에도 poi t s인 티마이오스의 과업은 『국가』에 나타난 수호자의 과업과 일치한다. 티마이오스는 수학도 다룬다. 수학은 『국가』에 나타난 예비학문(mathemata)에 속한다; 데미우르고스는 poi t s로서 이데아에 의존하며, 티마이오스는 로고스에 의해 '강제된다'.


데미우르고스와 티마이오스는 모두 자신의 일을 즐겁게 하는 모방가이다. 데미우르고스는 자신의 작품을 보고 즐거워한다(Tim. 37c). 이는 티마이오스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Tim. 59c). 『티마이오스』에서 많은 감각적 성질이 쾌락 개념과 고통 개념 아래에서 자세하게 설명되는 이유를 이와 연결해서 이해할 수 있다. 더 나아가서 데미우르고스의 작품인 세계도 즐거워하는 신이다(Tim. 34b). 비록 인간이 신이 아니기는 하지만, 인간도 이와 비슷하다
(Tim. 90c). 더 나아가서 티마이오스의 설명은 데미우르고스의 작품처럼 이데아의 모상물이다(Tim. 39e).데미우르고스는 이데아를 보면서 감각적 대상을 만든다. 이와 비슷하게 티마이오스는 이데아의 관점에서 감각적 대상을 이해한다(Tim. 28a, 52a); 데미우르고스는 '원하는 것'을 만들어내려고 필연을 설득하며(Tim. 48a), 이러한 설득은 성공적이다(Tim. 42e, 56c). 예를 하나 들면, 4원소를 정확한 형태와 수적 관계와 연결한다(Tim. 53b). 티마이오스가 이데아론적 인식을 감각적 대상에 적용한 것도 이와 일치한다. 티마이오스는 poi t s, 즉 물리학자일뿐 아니라 수학자이다. 『티마이오스』 19e에서 소크라테스는 티마이오스를 두 영역에 적합한 poi t s로 소개한다. ousia의 영역과 genesis의 영역이다. 보흐너에 따르면, 수학은 일종의 poi sis이다. 고슬링이 보기에 데미우르고스는 수학에 대한 지식에 의존한다. 자스라브스키에 따르면, 티마이오스는 『국가』에서 말하는 철인왕이다. 그는 세계를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수학적 지식을 갖추고 있다(Tim. 20a, 27a). 그런데 수학적 사물은 '설득되기' 보다는 '가르쳐진다'(Tim. 51e). 그래서 여기서 플라톤의 물리학은 수학을 감각 세계에 적용한 것으로, 그의 용어를 따르자면 설득 형태로 나타난다. 그러한 까닭에 엄밀한 설명(akribes logos)이 아니라 그럼직한 설명(eikos logos)이다. 데미우르고스도 티마이오스처럼 수학자이면서 동시에 물리학자이다.


세계 설명은 목적론적 관점에 달려 있다(Tim. 90e). 그러한 까닭에 티마이오스는 세 가지 종에 대한 설명도 매우 짧게 한다(Tim. 91e-92c). 이는 신, 또는 신들을 만드는 일에도 적용된다(Tim. 41b-d); 데미우르고스가 알려주는 것에 따르면, 질서 있는 세계는 영혼과 이성이 깃든 존재이다(Tim. 30b). 티마이오스도 똑같은 생각을 나타낸다;


데미우르고스는 무엇보다도 자신을 교육적 기능 아래에서 이해한다. 이는 티마이오스에게서도 마찬가지이다; 만들어진 세계는 잘 만들어졌을 뿐 아니라 아름답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 세 가지 조건이 채워져야 한다. 완전한 원상이 있어야 하며, 근거 있는 동기가 있어야 하며, 모방하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티마이오스는 데미우르고스의 근거 있고 좋은 동기에 대해 얘기한다. 소크라테스는 티마이오스가 원상을 모방할 수 있기에 적합한 poi t s라고 확인해 준다. 우리가 좋음 개념을 윤리적 의미로만 파악하지 않는다면, 좋음 개념에는 좋은 동기뿐 아니라 좋은 능력도 들어간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플라톤은 데미우르고스의 편에서 볼 때 좋음의 윤리적 측면이, 티마이오스 편에서 볼 때 좋음의 실용적 측면이 드러난다고 여겼다. 따라서 티마이오스가 좋은 데미우르고스라는 결론을 또 다시 내릴 수 있다; 데미우르고스는 세계를 만들 수 있을 뿐 아니라 파괴할 수도 있다(Tim. 41b). 그러나 그의 좋은 의지가 세계가 파괴될 가능성을 막는다. 티마이오스 역시 이러한 방향으로 나아간다(Tim. 54b); 티마이오스(Tim. 53b-c)와 데미우르고스(Tim. 53b, 69b)가 모두 4원소를 기하학적으로 구성한다; 데미우르고스는 질서의 관점에서 혼돈스러운 운동을 설명하려 한다. 티마이오스도 이러한 일을 한다. 그는 행성의 불규칙한 운동을 같음의 운동과 다름의 운동이 결합된 운동으로 설명하려 한다.


3 신과 신들


데미우르고스가 티마이오스를 나타내는 은유라는 테제를 뒷받침하는 근거가 또 하나 있다. 『티마이오스』에 나타난 데미우르고스는 신이다 그런데 플라톤은 신에 대한 설명과 신들에 대한 설명을 구분하지 않는다. 물론 데미우르고스가 그의 자식들인 항성들에게 나머지 세 가지 종들, 즉 물짐승과 들짐승, 날짐승을 만드는 일을 맡긴다는 표현이 나온다. 하지만 아름레더(Armleder)에 따르면, 『티마이오스』 41c-42e에서 데미우르고스와 신들이 과업을 나
누는 일을 문자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단지 은유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이렇게 과업을 나누는 은유적 목적은 데미우르고스가 만든 인간 영혼이 신들이 만든 인간 신체보다 더 우위에 있음을 강조하는데 있다. 그런데 딜론(dillon)에 따르면, 신적 데미우르고스는 생성물을 모두 책임진다.
데미우르고스는 그가 만든 신들에게 인간의 신체와 나머지 세 가지 종을 만들도록 과업을 나누어 준다(Tim. 41a, 42d). 하지만 그는 그 과업을 이루는 일에 직접 참여한다. 그는 원소들을 섞어 근육을 만들어내며(Tim. 73c), 뼈와 살을 질서 있게 인간 신체에 심으며(Tim. 74d, 75a), '살을 축축하게 하기 위해' 혈관을 통해 음식과 음료를 제공하며(Tim. 78b), 인간에게 영양분이 되도록 자연을 만들며(Tim. 80e), 땅 위에 사는 동물을 만든다(Tim. 92a). 여기서
플라톤은 같은 문장 안에서도(Tim. 27c) 종종 '신'이라는 표현을 단수와 복수로 사용한다(Tim. 71a). 더 나아가서 시각 능력과 청각 능력은 데미우르고스의 선물(Tim. 46e, 47b)일뿐 아니라 신들의 선물(Tim. 47c)이기도 하다. 이와 관련해서 『티마이오스』 92a를 이해할 수 있다. 여기서 데미우르고스가 신들의 과제도 수행한다. 그래서 뱀과 같이 기는 종을 누가 만들었는지가 불분명하다(Tim. 92a). 여기서는 원래 '신들이' 그 일을 해야 했다(Tim. 42d-e
참조). 하지만 앞 문장의 주어가 신이라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신'이 그 일을 해야 한다.

더군다나 인간 스스로 신이 될 가능성이 있다. 데미우르고스는 신으로서 세계를 만드는데, 이 세계도 신이다(Tim. 34b, 68e). 또한 그는 시간을 만드는데(Tim. 38c), 시간은 하늘에 있는 항성처럼 데미우르고스의 자식들(Tim. 42e), 즉 신들이다. 이러한 신은 가시적(可視的)이며 만들어진 것이다(Tim. 40d). 하나의 원소, 즉 불로부터 만들어진 것이다(Tim. 40a). 그 신들에게는 자손이 있는데, 티마이오스와 크리티아스는 그 자손이 전통적 신이라고 여긴다
(Tim. 40e-41a, Krit. 113c-114c). 그 자손의 어머니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다. 그들로부터 또 다시 인간이 태어난다.

인간은 티마이오스처럼 신들의 작품이다(Tim. 71d, 75e, 76e). 또한 인간의 영혼은 원래 항성 또는 신들에게 속한다

(Tim. 41d-e). 인간이 죽는 경우 인간 영혼은 항성의 영역으로 되돌아간다(Tim. 42b).
인간 외에 다른 생물조차 '신들'이라는 명칭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티마이오스』의 우주론은 신들과 전체의 생성에 관한 설명이다(Tim. 29c). 또한 나머지 세 가지 종의 생명체에 대해서도 얘기된다. 공중에 사는 생물과 지상에 사는 생물, 그리고 물에 사는 생물이다(Tim. 41b-d, 91d-92c). 티마이오스에 따르면, 이러한 종이 없다면, 전체 또는 세계는 완성되지 않는다. 이는 세계를 할 수 있는 한 좋게 만들려는 데미우르고스의 의지와도 모순될 것이다. 이제 데미우르고스가 이러한 종을 직접 낳았다면, 그러한 종은 신들과 같을 것이다(Tim. 41c). 사람들이 뒤집어씌울 수 있는 불경죄라는 비난을 피하려고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이와 연결해서 볼 때, 신과 인간의 구분도 일차적으로는 수사학적 구분일지 모른다. 티마이오스는 대화편 서두에서 계획을 할 때 언제나 신 또는 신들의 이름을 불러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강조하지만, 정작 그 자신은 이러한 요청에 따르지 않는다(Tim. 40e 참조) 물론 다른 구절에서는 비이성적 상태를 신의 부재로 여겨진다(Tim. 53b). 하지만 『티마이오스』 53b에 나타난 데미우르고스 신은 전통적 신에 속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러한 종은 신들의 아들들이다. 우리는 그 근거를 "신들 가운데 신들"이라는 표현(Tim. 41a)에서 찾을 수 있다. 필론(Philon)는 이 표현을 "신들 가운데 신"이라는 표현으로 바꾼다. 이를 통해 그는 신 개념을 다른 영역에서는 사용하지 않으려 한다. 많은 플라톤주의자는 원문을 그렇게 수정하지 않으면서도 이러한 용법을 피하려 한다.


이와 관련하여 프로클로스(Proklos)는 앞서 언급한 표현을 "나는 그 신들의 제작자이다"라고 고쳐 쓴다. 이와 같이 많은 플라톤 해석가는 그러한 해석을 피하려 한다. 그러한 해석을 받아들이는 경우, 예를 들어 뱀도 신적 존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반박에는 근거가 없다. 티마이오스는 세 가지 종을 무엇보다도 영혼 윤회라는 관점에서 설명한다. 신화의 교육적 기능이 여기서 드러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세 가지 종의 생물에 대한 설명이 신들에 대한 설명과 연결되는지도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종들은 타락한 인간이라는 의미에서 신들이다. 슈미트(Schmitt)에 따르면, 플라톤의 경우 인간과 동물 사이의 경계가 분명하지 않다. 여기서 데미우르고스는 전체의 제작자 또는 모든 감각적 종들의 제작자라고도 불린다(Tim. 41a).


또한 인간은 모든 존재 가운데 신을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라고 불린다(Tim. 42a). 인간의 이성적 부분과 그 처소가 신적이며(Tim. 44d) 거룩하다(Tim. 45a). 데미우르고스는 모든 것이 할 수 있는 한 자신과 닮기를 바란다(Tim. 29e). 여기서 "할 수 있는 한 닮게"는 데미우르고스와 인간 이성이 같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이 표현을 통해 데미우르고스를 인간 이성을 나타내는 은유라고 해석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인간 이성은 최고로 좋은 것이다(Tim. 89d). 이 규정은 데미우르고스에게도 적용된다(Tim. 29a). 또한 인간의 신적 부분인 인간 이성은 신적인 것과 친족 관계에 있다(Tim. 90a). 여기서 친족 관계는 동일성을 뜻한다. 그리스 신들의 활동은 여가에 하는 놀이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들을 모든 필연으로부터 벗어나 최고의 지식을 향해 가는 자들이라고 규정한다(Met. a1. 983a5 이하 참조). 티마이오스의 설명도 여가에 하는 놀이에 해당한다. 이러한 사실도 티마이오스와 신들의 동일성을 나타내는 암시일지 모른다.

그외에도 이미 말했듯이, 영혼은 항성에게 주어진다(Tim. 41d). 죽은 후에 좋은 인간의 영혼이 그곳으로 돌아간다(Tim. 42b). 따라서 여기서 영혼을 신들과 동일시할 수 있다. 티마이오스는 인간을 땅에 속하지 않고 하늘에 속한 존재라고 표현한다(Tim. 90a).


끝으로 세계는 행복한 신(eudaim n theos, Tim. 34b)으로서 자신의 작품을 보고 즐거워하는 데미우르고스와 비슷하다. 자신의 poi sis에서 기쁨을 얻는 티마이오스는 또 다시 이러한 세계를 모방하는 인간이다(Tim. 81b, 88d, 89a).

 

지금까지의 논의를 요약함으로써 글을 맺으려 한다. 이 글에서는 데미우르고스의 정체를 밝히려 했다. 이 글의 테제에 따르면, 세계를 구성하는 신으로 묘사되는 데미우르고스는 세계에 대해 설명하는 티마이오스를 나타내는 은유이다. 극중 인물 티마이오스 뒤에는 저자 플라톤이 있으며, 더 나아가서 인간의 오성이 있다. 따라서 데미우르고스가 존재 차원에서 세계를 구성하는 일은 결국 인간 오성이 인식론적 차원에서 설명(logos)을 통해 세계를 재구성하는 일이 된다: 세계는 로고스 속에서 만들어진다. 그래서 『티마이오스』의 세계 제작 설명은 우주 생성론이 아니라 우주론이다.
이러한 테제를 입증하기 위해 데미우르고스와 티마이오스의 유사점들을 밝히려 했다. 무엇보다도 둘 다 poi t s라는 점을 강조했다. 데미우르고스가 일(ergon) 차원에서 세계를 만드는 poi t s라면, 티마이오스는 인식론적 차원에서, 즉 말(logos)의 차원에서 세계를 만드는 poi t s이다. 설명과 설명 대상이 친족 관계에 있으며, 『티마이오스』에서 친족 관계가 '같음'을 뜻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데미우르고스가 티마이오스를 나타내는 은유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 외에도 데미우르고스의 작업와 티마이오스의 작업이 비슷한 점을 많이 지적하려 했다.
또한 『티마이오스』에서 신과 신들을 명확히 구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해 신 데미우르고스가 인간 티마이오스를 나타내는 은유일 수 있음을 간접적이고 암시적으로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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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ato and demiurge: explanation and constitution of the world

 

This article aims at identifying the demiurge who constructs the world in Plato's Timaeus. My thesis is as follows: the demiurge is a metaphor for Timaeus who explains the world and the changes in it; Timaeus is a mouthpiece of Plato, the author of the "Timaeus", who stands for human reason; That the demiurge constructs
the world in the ontological level, could mean, therefore, that the human reason reconstructs the world via logos in the epistemological level: the world is made in the theory (logos). It means that the explanation of the becoming of the world in the "Timaeus" is a cosmology rather than a cosmogony.
In order to support this thesis, the similarities between the roles and activities of demiurge and Timaeus are suggested: (1) the demiurge and Timaeus both are poi t s. The demiurge is a poi t s who makes the world in the ontological level (erg ), whereas Timaeus is a poi t s who makes the world in the epistemological level
(log ). This can justify that the demiurge is a metaphor for Timaues, for the explanation and its object are relatives (syngen s) which means 'same' in the "Timaeus". There are many other similarities which show that the demiurge is a metaphor for Timaeus. Futhermore, the fact that Plato does not, in fact, distinguish between the god and the gods in the "Timaeus" can indirectly imply that the demiurge, the god, is a metaphor for Timaues, the human rea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