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는 고대 헬레니즘세계에서 유행하였고, 원시기독교의 특징은 아가페로 인식된다.
이같이 아가페란 고도로 특화된 의미로 사용되는데 여기서 알고저하는 것은 사랑에 대한 `개념`이나 `사상`이다.
플라톤은 ``천상의 에로스``이다. 이는 인간이 신에 대한 욕구를 총칭을 말함인데, 욕구와 동경이며 하나님의 완전한 존재성에 대한 인간의 영적인 갈망과 굶주림에 대한 만족감을 말한다. 따라서 천상적에로스란 획득적 자기사랑을 말한다.
그러면 신약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이란 성격은 에로스와는 전혀 다른데,
신약의 사랑은 결핍된 것을 채우려는 추구의 동경적에로스 사랑이 아닌, 오히려 값없이 부어지는 하나님의 아가페에 대한 감사로서의 신앙(피스티스)로 표현되어진다는 점이다.
즉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란 술어는 ;; 에로스의 욕구적 성격도 신앙의 응답적 특색도 갖지 않는 외부로 오는 어떤 자극이나 동기와는 전혀 무관한 ``하나님은 자신의 본성 때문에 사랑하신다``는 명백한 사실에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선의 획득이 아니고 선의 실천으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아가페는 가치에 무관심한 점에서 에로스와는 구별되는데,
즉 하나님은 죄인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이란? 그 사랑하시는 사람들의 가치 유무성에 있음이 아니라 그분의 본성인 자신의 사랑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은 먼저 사랑하시는데 이에 비해 인간으로써 신에 대한 사랑은 기껏해야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사랑하신 것을 응답하는 수준을 못 넘는다.
아가페가 우정이나 적의에 의해 결정되지 않음은 바로 아가페가 대상과의 관계에서 자유롭다는 가치에 무관심하다는 말이 핵심이다. 그렇타고 대상적 가치에 무관심하다하여 응답에 무관심하다는 뜻은 아니다.
아가페가 어떤 대상에게 주어질 때 그 대상이 자신을 받아들이길 원한다.
이에 비해 에로스는 전혀 가치에 무관심하지 않으며 대상이 자신을 받아주기를 원하질 않고 그 대상을 소유하길 원한다.
종교는 영원한 존재이신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헬레니즘과 유대교와 기독교를 에로스, 노모스(율법), 아가페란 용어로 파악되는데,
두 길은 자기중심적이며, 아가페는 신중심적이다.
기독교에서 하나님과의 교제의 신중심적인 길이 충분하게 계시되었다. 즉 구원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하나님에게로 이른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은 무조건 수긍된다. 이것이 아가페의 길이다.
비기독교적 문헌 중에서 신중심적 성향이 가장 강한 것은 구약성경(신약을 분리했을 경우)으로 유대교는 사람이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과의 교제를 획득한다는 노모스를 근본동기로 삼고 있는 자기중심적 종교이다.
헬라종교도 자기중심적이다.
왜냐하면 천상지향적에로스가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을 추구함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와 결핍을 충족시키기 위한 최고선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즉 에로스의 자기만족이란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써 하나님을 추구하며, 본질적으로 하나님이 아닌 자신의 최고선을 목적하는데 단지 이것을 우연히 하나님과 동일시할 뿐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사에서
기독교의 사상이 나타나는데, 하나님은 무로부터 창조하셨고 우리의 존재와 소유를 값없이 주셨는데,
이 움직임의 동인은 하나님의 아가페로써 우리를 사랑하신 것 외 답이 없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이것은 창조의 은혜이다.
그러나 아가페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나타나기까지 우리는 하나님의 아가페의 깊이를 완전히 알수는 없었다.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은 멸망할 죄인을 구원하는 아가페로 나타났다.
창조와 구원은 모두 `은층` 즉 값없이 관대하게 베푸시는 아가페의 사역으로, 의로운 자나 불의한 자에게 태양과 비를 고루 주시듯이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동일하다.
이에 따라 기독교윤리의 근본원칙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주어라는 아가페이다.
에로스와 아가페를 자연과 은총으로 이해하는 것은 오해인데, 하나님의 본성에서 에로스와 아가페는 전적으로 반대이다.(하나님이 에로스의 시원자라는 면에 대하여는 추후 다루어질 것임)
에로스는 얻기를 좋아하는 고도로 세련된 형태로의 자기이익과 자기추구적 사랑이기에, 자기의 유익에 반하지 않는 이상 사랑할 수가 없다.
반면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않는 아가페란 에로스를 죄로 밖에 간주할 수밖에 없다. 아가페는 모든 형태의 이기심에 반대한다.
에로스와 아가페가 다 동일한 하나님에게로서 온다면 둘 사이에 근본적 충돌이란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종합을 추구해야 한다고 하지만 이것은 이상한 논법이다. 이러하다면 하나님의 에로스의 창시자이듯 죄의 창시자라고 말해야 할 것이기에이다. 하나님이 아가페라면 에로스는 하나님의 본성과 전적으로 반대된다.
헬레니즘의 에로스종교와 유대적인 노모스종교가 동일한 실체는 아니지만, 신플라톤주의자가 그의 에로스 때문에 자기중심적이라면, 율법을 준수하는 의로 하나님 나라에 참예하려고 갈망하는 바리새인도 자기중심적이다.
에로스와 노모스의 자기중심적 입장에서 보면 아가페란 불합리하다. 왜냐하면...
에로스의 관점에서는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할 이유를 풍성하게 발견하는데`` 인간의 소유된 결핍을 채워주는 분이 하나님이기에이다. 그렇치만 인간에겐 하나님이 원하실 만한 것이 없기에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실 이유란 전혀 없는 것이다.
노모스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실만한 이유를 충분히 발견``하는데 이는 의인들은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며 죄인들을 사랑하실 이유를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가페의 관점에서는 ``하나님은 사랑의 본성을 지니고 계시기 때문에 그 아가페로 사랑하신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 아버지를 닮아서 그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다.
어떤 비평가는 아가페의 본성이란 자기무시, 자기희생적이기 때문에 자기파멸이라는 극도의 불합리를 내포한 것처럼 보인다고도 하지만, 실제로
아가페란 자아죽음과 이기심죽음을 의미하기에, 자아가 대적이 아닌 자기중심주의가 대적인 것이다. 자기중심주의란 진정한 개성의 치명적 원수이다.
인간은, 아가페에 의해서 그리고 아가페 안에서 살아갈 때에만 진정한 자아를 실현할 수 있다. 바로 이 목적을 위하여 아가페이신 하나님꼐서 사람을 창조하셨다.
사람이 이러한 아가페를 받아들이면 인간은 자기중심주의라는 감옥에서 구출되어 하나님의 자녀로 찬란한 자유를 누리게 된다.
이런 아가페의 관점에서 볼 때 에로스와 노모스의 합리성이란 자연인의 합리성에 불과한 것이 된다. 즉 자연인이란 자신에게 대가 없는 무익한 일이란 아무런 흥미와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것으로 조건적인 것이다.
바로 `행복론`에서 어거스틴과 저스틴이 철학에서의 행복에 대한 철학이 답을 주기를 원했는데, 그래서 행복이란 세상의 모든 철학을 진품모조품으로 시험하는 시금석되었으며 기독교가 참된 철학임을 역사에 천명한 것이다. 기독교가 참된 철학이라 함은 즉
아가페에서만이 철학의 진정한 목적인 행복 달성이 ``하나님의 교제`` 이루어진다는 것이기에 아가페에서만이 하나님의 진정한 교제로의 관계와 참된 축복으로 인도할 수 있다는
유일철학으로 남게 된다 정녕 그것만이 안전하고 유익한 철학일뿐이다.
그래서 이방인 철학자들도 하나같이 부르짖기를 구원과 계시를 갈망했었는데 바로 예수로 아버지의 아가페가 온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인 에로스의 답은 계시(=구원)인 아가페이다
< 안더스 니그렌, 아가페와 에로스의 서문 중심으로 요약 >
글쓴이 / haabb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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